30년 좀 넘게 살아온 내가 본 한국은 사회 전체가 사람이 편한 꼴, 쉬는 꼴을 못보는 정신병에 걸린 나라다.

고등학생 때는, 아무 이유없이 아침 일찍 불러서 0교시라고 자습을 시키질 않나... 웃긴 건, 일찍 불러서 등교하더라도 자는 놈들이 태반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건 당연한거다. 무슨 노가다판도아니고 학생들을 5시, 6시에 기상시켜서 등교를 시킨단말인가? 심지어 선생도 출근 안한시간에 불켜고와서 앉아있는거다.

어짜피 공부라는 건 할 놈은 하지말라고 때려 죽여도 알아서 하고, 안 할 놈은 하라고 때려 죽여도 안한다. 다르게 보자면, 할 놈은 알아서 자기 시간을 최적화 시켜서 목표달성을 위해 효율적으로 쓸 것이고, 안 할 놈은 그냥 잠이라도 넉넉하게 자게 두어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최소한 정규수업시간동안이라도 깨어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요즘에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0교시랍시고 잠도 못자게 쓸데없이 일괄적으로 깨워다가 뭔 짓거리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간다.

'가만히 둬도 안하는 놈들은 그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시켜야한다'는게 반박이라면 그렇게 책상 앞에 앉혀놓는다고 그 친구들이 그 시간에 공부를 하냐? 라고 되묻고싶다.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군대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할게 없으면 청소라도 해라' 이게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진짜로 우천으로 출동못하고 할 거없으면 하면서도 '이걸 왜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쓸데없는 작업시키고 주변 청소시키는거보면 세상 이런 비효율적인 집단이 따로없다.

어떤 간부는 '몸이 편하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고 그게 사고로 이어진다'는데, 나는 이런 말같지도 않은 말을 들으며, 그 지시를 실제로 수행하면서 몸이 피곤해지고 '살 수가 없다'라는 생각을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 일터에서는 점심 회식, 음주없는 회식, 1차만 간단하게 하는 회식 등 개인주의의 발달로 회식 문화가 조금씩 쫓아가고있지만 아직도 옛날 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웃긴건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야되는데 자정, 더 넘어가면 새벽까지 회식을 한다. 상식적으로 일을 업으로 삼는 직장인이라면 다음날 출근할 것을 고려하고 다음날 업무에 최대한 지장 안가도록 일정을 짜는 것이 상식이고 정상인 상황 아닌가? 그런데 다음 날 출근해야하는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전가하고, 회식은 회식대로 뒤질 때까지 끝까지 가는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할거라면 다음 날 휴무를 주는 것이 상식적인 처사 아닌가?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지, 주객전도가 된 상황이다. 그리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다수가 상식인 것처럼 말을 하며,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결론적으로 내가 봐온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회시스템이건, 한국에서 사회화가 되고 한국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있는 한국인이건, 개인이 육체적으로 피곤한 상태, 개인을 육체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인은 피곤한 상태에 익숙해야 한다'라는 유전자를 심어주고자 민족적으로 노력하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상식적인 이유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쓸데 없는 이유, 비효율적인 이유, 아무이유 없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나라의 사회 시스템과 정신문화에는 비효율과 비상식이 뿌리깊게 녹아들어 있으며, 이는 근면, 성실과 같은 긍정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싶다. 더 웃긴 것은 이제 구분이 안되는 건지,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효율과 비상식을 근면과 성실인 것처럼 말하며 그렇게 해 온 자신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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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한국의 사회는 일본보다 20년정도 늦으며, 중국은 이러한 한국보다 20년정도 늦다고 한다.

 

카이지는 90년대 후반에 나온 만화이지만 그때부터 이미 일본은 입시지옥, 취업지옥으로 인한 사회현상을 모두 겪고있었으며 평범한 만화가인 카이지 작가가 이러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잘 그려내고있다.

 

물론, 짤에서 토네가와에게 일침을 당하는 카이지를 비롯한 인물들은 사회에서 정해진 길 혹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가혹한 경쟁에 의해 실패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인내'를 찾아볼 수 없는 엠생 그 자체로, 답없는 인생을 살다가 도박빚 등등의 이유로 잡혀온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지옥불반도 드립과 함께 꼰대들의 노력이 부족하다 드립이 난무하였으나, 경쟁시스템의 구조적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으며 한동안 '노오력이 부족하다'로 비꼬아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웃긴건 아무리 바늘구멍이고 뉴스에서 어렵다 어렵다 하더라도, 내 주변사람들 중 '내가봤을때, 저사람은 되겠다'싶은 사람들은 다 멀쩡한 사회인으로 거듭나 어디가서 명함은 내밀 수 있을 정도의 직장을 구해 잘 다닌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천재도 아니고 대학재학 중 만났던 그냥 내 기준에서 성실하면서도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난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물론 멀쩡한 사회인의 기준이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의 직업을 갖는 것이냐? 라고 반문한다면 'Yes'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학진학 이유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 혹은 사업을하여 성공하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사회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많은 대학생들도, 취준생들도 공부를 통한 성공의 현실적인 평가잣대를 "그래서 직업이?"로 귀결시켜버리기에 간단하게 저런식의 표현을 쓴 것이다.

 

나도 늦게 정신을 차려서 5년정도만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해봤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5년간 내가 느끼고 내가 느낀 것을 확인하고자 '내가 봤을때 노력하는 타인'에게 물어봤을 때도 그들도 동감했던 것은 자신이 판단하여 '스스로 열심히 했으니까 이정도면 붙겠지?'가 진실되고 객관적인 노력의 척도가 아니라 타인이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야 이정도로 하면 넌 붙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거나 생각이 절로들 때, 객관적인 노력의 척도라고 동감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 말도 쓰고보니 웃긴 것이, 객관적이란 단어는 타인이 주체가 되는 말이기에 객관적인 노력의 척도라는 말 자체가 타인이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기때문이다.

 

물론 타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해서 목표한 바를 다 이루느냐? 그건 또 아닐 것이다. 과거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처럼 그들만의 리그 중에서도 상위 몇명만 뽑기 때문에 재능의 영역까지도 극한으로 평가받는 시험에서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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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은 내가 알고 느낀 것만큼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어렸을 적 기초생활수급자로 살 정도로 집이 가난했었는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보니 돈이 행복의 척도처럼 느껴지게되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돈이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헌데 현재 내가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살아보니,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비교를 통해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기에, 비교를 먼저 해보자면 나는 내 주변 평범한 또래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소득이 높다. 그래서 이런 것을 통해 유추해봤을 때, 내가 또래보다 많이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 뿐만 아니라 재벌아들, 금수저아들 등등 전체 또래 인원을 100으로 본다면 몇번에 서 있을 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돈때문에 과거처럼 당장 내 생활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없다. 절약이라는 것이 생활 양식이 되어버린건지 쓰고싶은대로 다 써도 월급이 몇백씩 남는것보면 확실히 돈에 대한 불편함은 해소 된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느냐? 또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드는데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불편과 비교에서 오는 unhappy한 상태를 막아주는 수단 아닐까?' 예를들어 0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돈이 없어 불편하고 unhappy한 상태를 -n이라고 생각한다면 -n은 0까지 상쇄시켜주고 조금 더 단순한 +로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의미있는 행복감의 수준까지 +로 만들어주지는 못하나?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만큼 돈이 있는게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정말 돈을 무한하게 쓸 수 있다면 행복해지나? 그런 생각도 해본다. 지금은 나는 내 집도 없기에 행복해지기에 충분한 자산액이 아닌것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집을 하나 가진다는 것 자체가 누가 만들어 놓은 행복의 기준인가?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들 보다는 비교적 높은 소득이지만 궁극적으로 하기싫은 노동에서 오는 소득이기에 행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노동에 묶여있기에 행복하지 않은것인가? 라고 다시 생각해보자면 나는 노동이 하기싫은 부분을 어느정도 차지하지만 이것 때문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요즘에는 모르겠다 어디서 행복이 오는 것인가?
하나 점점 느껴지는 것은 살면 살수록 무엇인가 점점 결핍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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